...젤 선생님.
...엔젤 선생님.
엔젤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불현듯 눈을 떴다. 피곤함에 잠시 눈을 감고 있는다는 것이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엔젤은 흐릿한 눈 앞의 초점을 되돌리기 위해 잠시 눈꺼풀을 느리게 움직이다가 시선을 돌렸다. 책상 위에 자연스럽게 에너지음료를 내려놓으며 학생부장 선생님이 걱정스레 엔젤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든 엔젤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매만졌다.
"요즘 많이 피곤해 보여."
"날이 너무 더워서요... 잠을 못 자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
"네. 여름이 너무 기네요."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기력이 떨어지면 어떡해. 몸에 좋다는 것 좀 먹어."
큰언니 처럼 언제나 자신을 걱정해주는 학생부장 선생님의 다정한 말투에 엔젤은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책상 위에 올려진 에너지 음료를 손에 쥐며 '잘 먹을게요, 선생님' 하고 애교 섞인 감사 인사를 건네는 엔젤이 귀엽다는 듯, 학생부장 선생님은 어깨를 한 번 토닥여 주었다.
"오늘 3반에 전학생이 한 명 오기로 했어."
"지금, 전학생이요?"
"그러게요. 이 시기에 전학생이 드물긴 한데..."
엔젤은 지금 담임을 맡고 있지 않았지만, 3반의 담임인 번개고룡이 조부상으로 인해 자리를 잠시 비우는 바람에 임시 담임을 맡고 있었다. 전학생에 관련된 전달사항을 다 듣고 나서 엔젤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잘 챙길게요."
"그럼 오늘 수업 준비 잘하고, 우리 기운 좀 냅시다."
학생부장 선생님은 여전히 엔젤이 걱정된다는 듯 다시 한 번 등을 쓸어주고 뒤돌아섰다. 교무실의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도 엔젤은 매우 지친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꽤나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엔젤은 '네! 힘낼게요!' 하고 나름 씩씩하게 대답하고는 에너지음료의 뚜껑을 열었다. 탄산이 섞인 탓에 목구멍이 알싸하게 울리는 느낌이다. 엔젤은 달갑지 않은 감각에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가 자꾸 밀려오는 피로감을 지워내려는 듯 양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함께 교무실을 쓰는 선생님들은 전부 수업에 들어가고 홀로 책상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던 엔젤은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을 심각한 얼굴로 올려 보았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는 소리는 없었던 것 같은데. 짙은 회색 구름들은 잔뜩 빗방울을 머금고 있는 탓인지 금세라도 모든 것을 땅바닥으로 쏟아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숨 막히게 더운 것 보다는 한바탕 시원하게 비가 쏟아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언제나 자신의 책상 맨 아래 서랍에 넣어두는 옅은 하늘색의 접이식 우산을 떠올렸다. 중학교 시절부터 단 한 번도 잃어버리지 않고 써 온 우산이다. 우산 안쪽 부분에는 고신, 하고 이름이 동글동글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이제는 조금 낯설어진 그 애의 글씨였다. 우산을 챙겨오지 않았던 어느날 그 애가 빌려준 우산이었는데 돌려주는 타이밍을 놓치고 난 후, 계속 엔젤이 사용해 왔다.
"저기..."
쏟아지는 빗소리에 엔젤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커다란 나무들이 거센 빗줄기를 맞으며 하염없이 흔들린다. 엔젤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창밖에서 계속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기요... 선생님?"
갑작스레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화들짝 놀란 엔젤이 어깨를 떨며 옆을 돌아보았다. 짙은 남색 교복 자켓 안에 하얀색 셔츠를 말끔하게 입은 아이가 동그란 안경 너머로 자신을 조심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까만 눈동자 안에서 제 모습을 발견했을 때 엔젤은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짐을 느꼈다. 귓가에 울리던 빗소리도 에너지 절약을 위해 에어컨 대신 틀어놓은 낡은 선풍기의 소리도, 심지어 자신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엔젤은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하고 제 오른쪽 귀를 매만지다가 다시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긴장을 했는지 조금 머뭇거리듯 아이가 다시 입을 연다.
"안녕하세요. 저... 오늘 전학 오기로 한 학생인데요. 버스를 잘못 타서요. 좀 늦었어요. 죄송합니다."
비가 온다는 건 아이도 듣지 못했는지, 교복과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젖어서 쏟아져 내리는 머리카락을 반복적으로 쓸어올리며 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엔젤을 향해 어색한 듯 웃어 보인다. 꿈인가. 엔젤은 현실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주 세게 제 손바닥을 손톱으로 꾹 눌러 보았다. 아프다. 그럼 꿈이 아닌가.
"선생님?"
"..."
"아, 저..."
"미안해요. 내가 오늘 너무 정신이 없어서."
엔젤은 여전히 주먹을 꾹 쥔 채로 느리게 숨을 내뱉었다.
"전학생이라고 했죠?"
"네."
조금 낮고 끝이 부드럽게 떨어지는 목소리까지. 엔젤은 갑자기 밀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잠시 짚었다가 두 눈을 반복적으로 여러 번 깜박였다. 정신없는 엔젤의 행동에 잠시 당황한듯한 아이가 그런 엔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아! 맞다!' 하는 탄성과 함께 가방을 열어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전학에 필요한 서류였다.
"이거..."
아이가 건넨 파일을 받아든 엔젤은 천천히 안에 든 흰 종이를 꺼내 들었다. 본능적으로 시선이 어지럽게 움직여 아이의 이름을 찾는다. 한 글자, 한 글자를 눈에 새기듯 엔젤은 작고 반듯한 글씨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도 알지만. 무언가에 쫓기는 다급한 사람처럼 그렇게 그리운 이름을 찾아본다.
성명 ㅣ 고신
엔젤이 다시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아도 보이는 건 그 이름이다. 고신.
"고신."
"...네?"
"고신...?"
"네, 제 이름인데... 아, 혹시 뭐 잘못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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