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밖에서 모닥불이나 겨우 피워놓고 자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만, 역시 그래도 쇼파에 오래 누워있는 건 등허리가 배긴다.
블랙은 찌푸둥한 몸을 애써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고신이 어젯밤에 들어오긴 한 건지 모르겠다.
아직도 창밖 활주로 끝에 서 있는 것이, 어쩐지 저기에 서서 밤을 샌 것 같기도 하다.
겉옷을 챙겨입고 당장 밖으로 나간다.
마을에 같이 나가기로 한 건 둘째치고 일단은 고신을 당장 공항 안으로 데려올 생각이었다.
블랙은 성큼성큼 걸어 활주로를 따라 걸었다.
꽤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블랙을 눈치채지 못하는 걸 보면 꽤 열중하고 있는 모양이다.
날개는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블랙 : "저기요"
고신 : "...아, 일어났네요"
블랙 : "계속 여기 있었던 거예요?"
고신 : "아녜요. 방금 나왔어요"
웃기시네. 양 볼은 그렇게 새빨개져서 방금 나왔다고?
그러나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고신 : "바로 갈 거예요?"
블랙 : "아니요. 일단 잠깐 들어가요"
고신 : "들어갔다가 준비되면 나와요. 난 준비됐어요"
블랙 : "벽난로가 꺼졌어요. 장작이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도와주세요"
능숙하게 거짓말을 하나 지어냈다.
분명 뭔가 잘못된 동정심이었다.
누굴 동정할 처지도 아니면서.
고신은 굴뚝으로 퍼지는 연기를 보고도 순순히 따라 들어갔다.
활활 잘만 타고 있는 벽난로를 보고도 아무 말 않았다.
의도를 파악한 모양인데도 기분 나쁜 척 조차 하지 않았다.
어쩐지 더 슬픈 얼굴이었다.
블랙 : "테이프 있어요?"
고신 : "테이프요? 어떤?"
블랙 : "청테이프나 박스테이프. 어느 거든요"
고신 : "...창고에 박스테이프가 있을 거예요"
블랙 : "가져다주세요"
고신 : "왜요?"
블랙 : "그거라도 팔에 감아야죠. 팔이 제일 물리기 쉬운데. 좀비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물리는 거 한순간이잖아요"
고신 : "...가져올게요. 기다려요"
팔에 두세 겹 두껍게 테이프를 칭칭 감고, 두 용은 드디어 바깥으로 나간다.
고신은 긴장을 감출 수 없었다.
팔에 테이프를 감으니 이젠 정말로 실감이 나는 것 이었다.
아직 죽을 순 없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그뿐이었다.
블랙 : "괜찮아요?"
고신 : "...그냥 머리가 좀 아프네요"
블랙 : "열나는 건 아니죠?"
고신 : "..."
블랙 : "물리면 열부터 나요. 완전 고열. 40도도 넘는 열이 나요"
고신 : "..."
블랙 : "그런 건 아니죠?"
고신 : "...네"
자꾸 고신의 공포에 감미료를 더 한다.
이를 꽉 물었다.
분명 익숙한 거리인데, 좀비 걷는 소리랑 같이 보니 또 감회가 새롭다.
침을 한 번 꿀꺽, 그와 함께 공포를 삼키려고 노력했다.
고신은 과할 정도로 발소리를 죽였다.
눈을 밟을 때 나는 뽀득하는 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하다 보니 통 속도가 나질 않았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정비소까지 5분이면 가는 걸 한참을 돌아갔다.
고맙게도 블랙은 불평하지 않았다.
블랙 : "저기예요?"
대답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블랙 : "근데 뭘 가지러 온 거예요?"
고신 : "말해도 모를걸요"
블랙 : "..."
고신 : "정비소 뒤쪽을 한번 찾아봐요. 차 한 대 쯤은 남아있을 거예요"
블랙 : "...알았어요"
잔뜩 겁먹고 잘 걷지도 못하더니 이젠 또 마치 제집인 마냥 정비소로 걸어 들어간다.
블랙은 그런 고신의 뒷모습을 어처구니 없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시린 손에 입김을 한 번 호 불곤 정비소 뒤쪽으로 걸어갔다.
고신의 말대로 뭔가 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눈 쌓인 뒷마당에 첫 발자국만 소복소복 남길 뿐, 블랙은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자동차 비스무리한, 심지어는 오토바이나 자전거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기대도 않았지만 하나 정도는 남아있을 거라던 고신의 말을 마지막 희망인냥 붙들고 싶었다.
블랙 : "아무 것도 없는데요?"
고신 : "더 잘 찾아봐요"
정비소 실내에서 들려오는 무심한 목소리에 블랙은 아무것도 없는 공터를 애써 몇 바퀴 더 돌았다.
어쩐지 고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겨우 찾아낸 거라곤 반 부서진 자동차가 전부.
눈이 두껍게 쌓여서 겨우 발견해낸 것이었다.
도저히 굴러갈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추위를 버티다 못해 손에 감각이 전부 없어졌을 때쯤 블랙은 고신이 코를 박고 큰 상자를 뒤지고 있는 실내로 들어왔다.
고신은 그런 블랙을 슬쩍 보더니 손에 복잡한 부품을 몇 개 들고 일어난다.
블랙 : "원하는 건 찾았어요?"
고신 : "...네. 당신은요, 뭐 찾았어요?"
블랙 : "음"
그나마 찾은 자동차는 낡아서 도저히 굴러갈 수가 없을 것 같다고 전하니 고신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깥으로 나가 블랙이 발견한 자동차를 살폇다.
고신 : "...여기 정비소 주인의 옛 자동차네요. 이리저리 개조가 많이 되어있을 텐데"
블랙 :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고신 : "여기서 일했었거든요"
고신은 능숙하게 연장을 챙겨 바깥으로 나갔다.
차 위에 쌓인 눈을 맨손으로 밀어치우고 차의 앞뚜껑을 열어 뭘 이리저리 확인을 해대더니 블랙을 빤히 바라봤다.
블랙 : "...왜요?"
고신 : "도와줘요. 그러면 고칠 수 있겠어요"
블랙 : "이걸 고친다고요?"
고신 : "별로 망가진 건 없어요. 타이어에 바람 넣는 거만 도와줘요. 저쪽에 공기압 주입기 있어요"
고신의 얇은 손끝이 작은 기계를 가리켰다.
그걸 가져다주고 블랙은 구경만 했다.
그 추운 데에서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뚝딱뚝딱 무언가를 고쳐내는 게 신기했다.
꽁꽁 얼어붙은 손으로 잘도 해낸다.
보는 블랙의 손이 다 시릴 지경이었다.
블랙 : "기름은 있어요? 주유소에 하나도 안 남았던데"
고신 : "언제 주유소까지 가봤대요"
블랙 : "차가 한 대는 있을 것 같아서 주유소에도 가봤죠. 근데 없더라고요. 기름도, 차도"
고신 : "당연히 없겠죠. 내가 다 뽑아놨으니까"
블랙 : "..."
고신 : "공항에 가져다 놨어요. 그걸 써요. 20갤런이면 밴쿠버까진 갈 거예요"
블랙 : "...알겠어요"
고신은 자동차 앞뚜껑을 닫았다.
수리가 끝난 것 같았다.
블랙 : "이만 가요. 고신 씨도 원하는 거 찾았다매요"
고신은 어쩐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일어나 부품을 챙겨서 나갔다.
올 때만 해도 벌벌 떨더니만 갈 땐 또 거침이 없다.
블랙은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공항에 다시 도착하자마자 고신은 가져온 부품을 비행기 언저리에 대충 두고 안으로 들어가 창고에서 기름이 든 통 하나를 들고나와 그걸 블랙 앞에 내놓았다.
고신 : "일단 한 통만 가져다가 넣고 운전해서 다시 여기로 와요. 20갤런이면 75리터인데 그걸 다 들고 가려고요?"
블랙 : "..."
고신 : "뭘 그리 멀뚱멀뚱 서 있어요?"
블랙 : "엄... 근데 저 사실 운전 못 해요"
고신 : "..."
블랙 :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요"
고신 : "..."
블랙 :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도와달라고요"
고신 : "...오른쪽이 악셀이고 왼쪽이 브레이크예요"
블랙 : "아 진짜..."
고신 : "면허 없어요?"
블랙 : "있기야 한데.. 장롱이라서"
고신 : "여기까지 오는 건 괜찮잖아요.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아예 운전 못 해본 것도 아니니까"
어쩐지 고신은 더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기야, 차도 고쳐주고 기름도 주고, 밥도 주고 잘 곳도 내주고.
아무리 착한 용이라도 이런 추운 세상에서 쌩판 남을 더 도와주고 싶을까.
블랙은 애써 납득하고 기름 한 통을 쥐었다.
블랙 : "...다녀올게요"
대답도 않고 고신은 바로 비행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갑지만 어쩐지 차가운 사람이라고 도저히 말할 수가 없는 저 뒷모습을, 블랙은 측은한 눈으로 한참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좀비의 이목을 피해서, 무거운 오른손을 달래며 블랙은 다시 정비소로 걸어 들어갔다.
서툰 솜씨로 주유구를 열고 가져온 걸 들이부었다.
지독한 휘발유 냄새.
저도 모르게 코를 부여잡았다.
다행히도 오는 길이 복잡하지 않았고, 정비소에서 거리로 차를 빼는 데에도 큰 어려움은 없었기 때문에 운전대를 아주 오랜만에 잡는 블랙도, 핸들을 꽉 쥐어 잡은 양손에 땀이 맺혀도 어디 들이박아서 큰소리를 낸다거나 하는 일은 다행히 없었다.
중간중간 브레이크를 급하게 밟기는 했지만 이 정도가 어디야.
걱정했던 것 보다 블랙은 잘 해냈다.
나 운전 못 한다고 내 차 안 탄다고 했던 용들 다 두고 봐. 나 완전 잘해. 완전 짱.
블랙이 공항에 다시 도착해서 삐딱하게 주차하고 차에서 내렸을 때 고신은 바깥에 없었다.
블랙이 고신을 만난 지는 이틀이 채 되지 않았지만, 고신이 추워서 안으로 들어간 것은 절대 아니리라는 것을 알았다.
일이 빨리 끝난 건가?
그렇다기엔 아까 고신이 챙겨온 부품은 비행기 옆 공구함 언저리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기 때문에, 잠깐 무얼 가지러 들어간 것이리라.
블랙은 그렇게 생각하고 바깥에 놓여있는 기름 두 통을 모두 주유했다.
주유를 끝내고 기름이 여유롭길래 차 안에 히터를 틀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한참을 기다려봐도 고신은 쉽게 나오질 않았다.
무얼 가지러 들어간 것도 아닌 건가? 그렇다면 정말로 추워서?
혼자 생각하고 혼자 고개를 젓는다.
그럴 리가 없어.
블랙은 결국 차에서 내려 건물로 천천히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기 직전에 블랙은 멈췄다.
안에서 들려오는 작은 말소리.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혼자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있는 고신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고신 : "....어떻게 내가 .....잠에 들 수 있겠어"
블랙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하얗게 얼은 유리창을 손으로 문질러 닦아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서 고신은 웬 주황색 편지 한 장을 앞에 두고 작은 녹음기에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혼자 말하길래 혹시 미쳐버린 건가 싶었는데 다행이다...
안심하곤 뒤로 물러나 다시 차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더 엿들을 의도는 없었던 것이다.
정말이었다.
고신 : "...하람아. 곧 봐, 우리. 나 곧 출발할게. 다 완성했어. 한국으로 돌아갈게. 나 돌아갈 수 있어"
블랙 : ...한국?"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놀란다.
혹시 고신이 듣진 않았겠지.
안절부절 못 하면서도 도저히 자리를 뜰 수가 없다.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고작 저 비행기로?
고신에게.
가을 편지만 보내려다가, 10월이면 네가 사는 지역은 한국만큼 추워진다고 해서 두 개를 같이 보내.
겨울 편지는 내 생일 날 보도록 해! 미리 열어보면 죽어!
캐나다 10월은 어때. 단풍은 예쁘게 들었어? 바람은 많이 불어?
난 지금 인천인데, 우리 집 앞에 은행나무가 너무 많아.
노란 게 예쁘긴 하지만, 그래도 냄새는 좀...
캐나다는 단풍이 유명하잖아. 사진 많이 찍어왔으면 좋겠어!
난 너 대신 붕어빵 많이 먹을게.
우리 매일 연락하고 얼굴도 보지만, 어쩐지 잘 지내냐고 써야 할 것 같아... 잘 지내지?
나는 이제 매 주말마다 엄마 집에서 지내려고.
너도 없는데 주말에 혼자 뭐 하겠어. 그냥 엄마랑 있는 게 낫지.
너랑 하루종일 통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애써 영화나 틀어놓고 시간 때우면서 왜 인천에 내려갈 생각은 못 했나 몰라.
곧 연말이기도 하고, 너도 곧 오니까.
엄마한테 너랑 결혼한다고 말도 할 겸, 오랜만에 내려오니까 좋다.
바로 코앞인 서울에 살면서도 집에 오니까 이렇게 좋은데, 너는 그 멀리 떨어져서 얼마나 집에 가고 싶을까.
지난 가을에는 둘 다 바빴지... 매번 단풍 구경하러 가자고 말만 하고 엄청 바빴어...
쉬는 날엔 꼭 붙어서 영화나 틀어놓고, 그치?
그래도 그거 좋았어. 손 꼭 잡고 계속 졸았잖아. 이럴 거면 우리 영화 끄고 들어가서 자자고 그래놓고 침대에 누우면 막상 잠이 안 왔었잖아. 아, 혹시 나만 그랬던 거야?
아무튼 전화로도 매번 말하니까 이제 보고 싶다는 말은 그만 쓸게.
그치만 지금 당장 전화할래.
아, 넌 밤인가? 그래도 걸면 받지 않을까...? 혹시 잠에서 깨더라도 한 번만 봐줘. 알겠지?
녹음기를 켰다.
고신 : "...너 이날 바로 나한테 전화 걸었지. 캐나다는 새벽 3시였는데"
이제 10월이고 곧 만날 수 있다고, 자고 있을 걸 알면서도 그 새벽에 신이나 전화를 건 건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는 행동이었다.
고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또 말을 잇지 못했다.
녹음기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것이 우스워도 고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고신 : "네가 없이 어떻게 다시 잠에 들 수 있겠어. ...하람아. 곧 봐, 우리. 나 곧 출발할게. 다 완성했어. 한국으로 돌아갈게. 나 돌아갈 수 있어"
녹음기를 급하게 내려놓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았다.
어전지 몰려온 공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게 무슨 느낌인지 생각해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싸하나 시선이 느껴지는 창가로 시선을 돌렸을 뿐.
그리고 거기서 마주친 블랙의 심각한 눈동자에게 요동치는 심장의 원인을 덮어씌운 것이다.
블랙은 고신과 눈이 마주치고 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남을 훔쳐보는 게 꽤 지저분한 일인 줄은 저도 알긴 아나 보다.
그러나 고신은 블랙에게 왜 훔쳐봤냐고 따질 생각도, 어디까지 들었냐고 물을 생각도 전혀 없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내일이면 뜯어볼 겨울 편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뒷걸음질 치던 블랙은 곧 들어왔다.
아마 고신에게 용건이 있는 것은 아니고, 짐을 가지러 들어온 것이리라.
어짜피 너나 나나 곧 떠날 테고,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텐데 남아있지도 않은 기력으로 감정을 긁어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블랙 : "이봐요"
그러나 고개를 들어 바라본 그 표정엔 화가 잔뜩 있었다.
고신은 왼쪽 눈꺼풀을 떨었다.
블랙 : "...이게 다 뭐예요"
고신 : "..."
블랙 : "저 비행기로는 잘해야 퀘백 정도 가겠다 싶었는데, 뭐, 한국? 왜요? 한국에 사랑하는 용이라도 두고 왔어요?"
고신 : "...그만"
블랙 : "지구 반대편이에요. 돌아갈 수 있다고요? 그렇게 정말 생각하는 거 아니잖아요"
블랙의 오지랖이 거기서 터진 것이었다.
블랙 : "밴쿠버로 가자니까요. 그게 사랑하는 용한텐 더 큰 기쁨 아니겠냐고요. 근데 당신이 하고 있는 건 그냥 그거 완전, 그냥..."
흥분돼서 말이 잘 안 나왔다.
다행히도 고신이 굳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블랙은 말을 정리할 시간이 있었다.
블랙 : "그냥, 그건 비겁한 용의, 비열한 용의 태도잖아요"
고신 : "블랙 씨"
"잘 가요" 그 말이 블랙에겐 '나가' 그렇게 들렸다.
고신이 했던 것처럼 왼쪽 눈꺼풀을 떨었다.
그게 고신에겐 불쾌의 표시인 것 같았으니까.
블랙은 인사도 없이 나왔다.
블랙의 선한 동정은 잘못 된 방식으로 터져 나온 것이 분명했다.
짐을 트렁크에 아무렇게나 싣고, 마을에서 공항까지 운전한 겨우 그걸로 잘 해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블랙은 차를 거칠게도 몰아 공항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고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가, 그냥 호흡을 멈추면 어떨까.
그러나 고신은 그렇게 가만히 앉아있기 시작한 지 10분도 채 안 돼서 일어나 나갔다.
가져온 부품을 얼른 맞출 셈이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되도록이면 오늘 출발하고 싶었다.
오후가 되어도 해가 뜨지 않았다.
구름이 잔뜩 껴선 눈을 애매하게 한 두 톨씩만 떨구고 있었다.
몇 달 내내 닫힌 적 없던 공구함을 드디어 닫곤 고신은 공항에 들어가 그 안에 한참을 있더니 스티커가 모두 뜯어진 편지 네 장과 녹음기, 그리고 구석에 있던 고글을 챙겨 나왔다.
녹음기를 눌러 켰다.
고신 : "...편지 하루 일찍 읽어서 미안해. 구름이 많이 꼈어. 너 이런 날씨 싫어하는데. 나도 이제 싫어진 것 같아. 그래도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릴 순 없어"
고신은 눈을 감고 하람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을 꺼내 보았다.
봄에 만났던 싱그러운, 아름다운.
거기서부터 천천히 거슬러 올라간다면, 여름엔 해변에서의 짠바람과, 가을에 단풍색으로 물든 뺨, 겨울엔...
고신은 몇 달간 공을 들인 비행기에 몸을 드디어 올렸다.
오래 비행할 것을 생각한다면 의자가 꽤 불편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심호흡을 하고, 글로만 읽어본 조종을 시작했다.
활주로에서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를 내어 달리다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그대로 비행한다.
밴쿠버로 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철저히 무시한 것이었다.
녹음기를 켰지만 아무 말 않았다.
지상에서 떠오를 때의 소음이 어마어마했다.
귀를 막을 것을 챙기지 않은 걸 후회했다.
바퀴가 마침내 땅에서 떨어지고, 충분하지 못한 속도 탓에 기체가 흔들리자 고신은 고신답지 않게 크게 당황했다.
어떻게 해결을 할 수도 없었고, 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고신은 하는 법을 몰랐다.
몇 달을 만진 기계였는데도 그랬다.
그러다가 흔들림이 멎고, 안정적으로 위로 비행하다가 마침내 바다가 나오면 그제야 고신은 안도의 한숨을 쉬곤 한참 전부터 녹음되고 있던 기계에 말을 시작했다.
고신 : "...1월 30일인데, 미리 생일 축하해 하람아. 편지 하루 정도 일찍 본 건 봐줄 거지? ...결혼 준비는 됐나 모르겠네. 난 이제 출발했는데"
그러곤 또 말이 없다.
육지가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날아와 드넓은 바다 위 상공엔 드디어 고신 뿐이었다.
고신은 완전히 안심했다.
잠시 뒤, 기괴한 소리를 내며 빨간 전등이 켰다 꺼졌다 해도 그 안심은 계속됐다.
왜 긴급 부저가 울리나 봤더니, 역시나 부품 결여의 탓이었다.
고신 : "...하람아, 사실 있잖아. 아까 정비소에서 찾은 부품은 아무것도 없었어. 블랙 씨가 이상하게 볼까 봐 찾았다고 거짓말한 것 뿐이었어. ...결국은 눈치채고 오지랖을 부려댔지만. 마음씨는 참 착한 용이야, 요즘 세상에 드문. 물론 내가 사태 터지고 용을 만나진 않았지만... 그 있잖아, 드라마에서 보던 나쁜 놈들. 좀비보다 용이 더 무섭다고들 하니까. 무례하게 굴긴 했지만 어쨌든 밴쿠버로 무사히 갔으면 좋겠네. ...내 목소리 들리기는 해? 부저가 너무 시끄럽게 울려대서..."
비행기 안엔 낙하산도, 긴급탈출 기능도 전혀 없었다.
고신은 이젠 완전히 조종대에서 손을 떼고 눈을 감았다.
상승하던 것이 멈추고, 기체가 미친 듯이 흔들려도 아까처럼 긴장하는 일은 없었다.
고신 : "...내가 아까 걱정하던 건 다름이 아니라 바다까지 오지 못하고 추락할까봐였어. 다행이야. 생각보다 멀리멀리 온 것 같아서"
비행기는 비로소 추락했다.
높이 올라온 만큼 빠른 속도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한 두 톨 씩 작게 내리는 그게 어쩐지 구슬펐다.
...아, 저린다.
뼈 마디마디가 저려 온다.
돌아갈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한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다.
생각한 것은 오직, 해저비행.
나는 해저비행을 하게 될 테지.
나의 하람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나의 연인이, 나의 약혼자가, 사랑하는 나의..., 나의.....
겨울이 저문 북태평양 한 가운데엔 웬 폐비행기와 파편이 둥둥 떠다니고, 짠물에 젖은 파란색 편지 한 장은 그 몇 달 동안 찢어지지도 않고 용케 부유한다.
조류에 따라 이리저리.
그러다가 센 파도가 한번 들썩하니 등을 지고 있던 편지는 순순히 뒤집히고, 한 장을 가득 채운 파란 잉크는 안타깝게도 물에 번져 알아볼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고신에게.
1월 31일에 이걸 읽어봤다면, 당장 나에게 생일 축하한다고 한 번 더 메세지를 보낼 걸!
하루라도 일찍 봤다면, 이마를 한 대 쥐어 박아줄 거야.
............., 눈이 많이 왔다면 ......... .......... ......... ..........눈사람을 만들자.
네가 2월 말에 다시 돌아오니까................, ................ ..................
내가 어제 너한테 감기 걸린 것 같다고, 열난다고 그랬잖아.
병원에 가봤는데 감기는 아니래.
큰 병원에 가보라나?
고작 열이 나는 것 뿐인데 그냥 해열제 먹고 집에서 푹 쉬려고.
곧 나아질 거야.
의사는 자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상한 바이러스래.
무슨 의사가 그러냐?
돌팔이도 아니고...
근데 생각보다 많이 아프네.
열이 높게 나는 것 같아.
아무튼............., 많이많이 사랑해.
일찍 .............. 안녕. 고신아.
하람이.